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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September 28, 2026

미국 특허소송에서 청구항 해석은 항소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 CAFC의 쟁점 보존, Forfeiture와 심리기준

미국 특허소송에서 청구항 해석(claim construction)은 흔히 법률문제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지방법원이나 특허심판원(PTAB)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당사자는 연방순회항소법원(CAFC)에 가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면 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미국법원에서는 청구항 해석이 법률문제라는 점과, 항소심에서 어떤 해석 주장을 처음 제기할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CAFC 실무를 이해하려면 세 가지 질문을 구분해야 한다. 첫째, 그 해석 주장이 하급심에서 적절히 제기되어 항소심에 보존되었는가. 둘째, 보존되었다면 CAFC는 어떤 심리기준으로 원심의 해석을 검토하는가. 셋째, 사건 해결을 위해 그 용어를 실제로 해석할 필요가 있는가. 이 세 질문을 섞으면 forfeiture, waiver, de novo review, O2 Micro 의무가 하나의 법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층위의 규칙이다.

1. Forfeiture(실권)와 waiver(포기)는 같은 말이 아니다

Forfeiture와 waiver는 실무에서 혼용되는 경우가 있지만, 엄밀히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대법원은 United States v. Olano에서 forfeiture를 권리를 적시에 주장하지 않은 경우로, waiver를 알고 있는 권리를 의도적으로 포기한 경우로 구별했다. CAFC도 In re Google Technology Holdings LLC에서 이 차이를 명시적으로 확인하면서, 과거 판례에서 waiver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forfeiture를 다룬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구별은 특허소송에서도 중요하다. 당사자가 PTAB에서 특정 청구항 해석을 주장하지 않았다가 항소심에서 처음 꺼내는 경우는 전형적인 forfeiture 문제다. In re Google에서 Google은 명세서에 특별한 정의가 있다는 논리를 PTAB에 제시하지 않은 채 CAFC에서 처음 주장했고, 법원은 그 주장을 forfeited로 보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일반적으로 심판대상 기관에 제시되지 않은 쟁점을 항소심에서 새로 심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것이 절대적인 금지는 아니다. CAFC는 예외적 사정(exceptional circumstances)이 있는 경우에는 항소심에서 새 주장을 검토할 여지를 인정한다.

최근의 비선례 판결인 ST Case1Tech, LLC v. Squires도 같은 법리를 적용했다. 당사자는 PTAB에서는 “analysis”의 의미를 사실상 noise dosage 계산으로 특정했지만, 항소심에서는 noise dosage 계산을 하나의 예로 포함하면서 다른 형태의 음향 데이터 분석까지 포괄하는 더 넓은 의미라고 주장했다. CAFC는 이를 단순한 표현의 정리가 아니라 청구항 해석의 외연을 넓힌 새로운 주장으로 보았다. 항소심은 패소 후 청구항 해석의 외연을 다시 설계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법리의 핵심은 당사자 태만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항소심의 제도적 기능이다. 상대방과 하급심이 실제로 다툴 기회를 가진 쟁점만을 원칙적으로 항소심 기록 위에서 심리하고, 하급심을 건너뛴 새로운 주장을 제한하려는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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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만 PTAB가 예상하지 못한 해석을 채택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사자가 하급심에서 주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forfeiture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 주장을 제기할 공정한 기회 자체가 없었다면 별도의 문제가 생긴다.

Qualcomm Inc. v. Intel Corp.이 대표적이다. 그 사건에서 양 당사자는 문제된 청구항 용어에 “대역폭 증가” 요건이 포함된다는 데 사실상 의견이 일치했다. 그런데 PTAB는 최종결정에서 별도의 충분한 통지나 의견 제출 기회 없이 그 요건을 제거한 해석을 채택했다. CAFC는 PTAB가 언제나 당사자의 제안 해석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했다. 다투어지는 용어라면 Board가 어느 당사자도 제안하지 않은 해석을 채택할 수도 있다. 문제는 해당 사건에서 그 부분이 애초에 분쟁 대상이 아니었고, 당사자들이 다른 해석 가능성을 충분히 논증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CAFC는 이를 미국 행정절차법(Administrative Procedure Act, APA)가 요구하는 notice와 fair opportunity to respond의 절차 위반 문제로 보아 파기환송했다.

따라서 “당사자 합의와 다른 해석을 하면 곧바로 APA 위반”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정확한 명제는 다음에 가깝다. PTAB는 당사자의 청구항 해석에 법적으로 구속되지 않지만, 당사자들이 합리적으로 예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해석이 사건의 결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면 적절한 통지와 대응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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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존된 청구항 해석은 어떻게 심리되는가

쟁점이 적절히 보존되었다면 다음 문제는 심리기준이다. 여기서도 “청구항 해석은 법률문제이므로 모두 de novo”라고 단순화하면 Teva 이후 법리를 놓치게 된다.

Markman v. Westview Instruments는 청구항 해석의 최종 판단을 배심원이 아니라 법원이 담당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그러나 Teva Pharmaceuticals USA, Inc. v. Sandoz, Inc.는 청구항 해석 과정에 사실판단이 포함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지방법원이 외재적 증거(extrinsic evidence)를 토대로 한 보조적 사실판단을 했다면 그 사실판단은 Federal Rule of Civil Procedure 52(a)에 따라 clear error 기준으로 심리한다. 반면 청구항 문언, 명세서, 출원경과 등 내재적 증거(intrinsic evidence)에 기초한 최종적인 청구항 의미의 결정은 여전히 법률문제로서 de novo review의 대상이다.

University of Massachusetts v. L’Oréal S.A.가 이를 잘 보여준다. CAFC는 해당 사건의 청구항 해석이 내재적 증거에 의존하므로 de novo로 심리한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실무적으로는 “무엇이 사실판단이고 무엇이 최종 법률판단인가”를 분리해 항소이유를 구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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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원은 모든 용어를 반드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다. 법원이 청구항의 모든 단어에 사전식 정의를 붙일 의무는 없다. 다만 당사자 사이에 청구항 범위를 둘러싼 실질적인 분쟁이 있고 그 분쟁이 사건의 판단에 필요하다면 법원이 이를 해결해야 한다.

O2 Micro International Ltd. v. Beyond Innovation Technology Co.는 이 원칙의 출발점이다. CAFC는 당사자들이 청구항 범위에 관해 근본적인 다툼을 제기했는데도 이를 배심원에게 사실상 넘긴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MyMail, Ltd. v. ooVoo, LLC에서도 CAFC는 Rule 12(c) 단계에서 § 101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청구항 해석 분쟁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법원은 조기 종결 신청의 성격상 비신청인에게 유리한 해석을 전제로 § 101을 판단하거나, 그 해석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면 필요한 범위에서 청구항 해석 분쟁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전자는 비신청인의 해석을 최종적인 청구항 해석으로 확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Rule 12(c) 단계에서 비신청인에게 유리한 전제를 적용한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O2 Micro가 언제나 별도의 Markman식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쟁점이 결론에 영향을 주지 않거나, 항소인이 어떤 용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거나, 제안한 해석을 받아들여도 결과가 같다면 법원은 불필요한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청구항 해석은 추상적 법률자문이 아니라 사건 해결에 필요한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사법작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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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AFC가 직접 다시 해석하는가, 아니면 환송하는가

이 부분도 기계적으로 나눌 수 없다. 원심이 잘못된 법적 기준을 적용했고 기록만으로 올바른 해석을 확정할 수 있다면 CAFC가 스스로 청구항을 해석한 뒤 그 해석에 따라 판결을 유지하거나 파기할 수 있다. 반대로 새로운 해석에 따라 침해·무효 여부에 관한 추가 사실판단이 필요하면 사건을 환송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청구항 해석 오류가 있으면 언제나 CAFC가 직접 교정한 후 파기환송한다”거나 “원심이 해석하지 않았으면 CAFC는 반드시 직접 해석하지 않고 환송한다”는 식의 규칙은 정확하지 않다. 항소심의 처분은 쟁점의 성격, 기록의 완성도, 추가 사실판단의 필요성에 따라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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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실무상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보다 ‘쟁점 보존’이다

특허소송에서 청구항 해석은 기술적 의미를 정하는 작업처럼 보이지만, 항소 단계에서는 절차법적 성격이 훨씬 강해진다. 어떤 의미가 옳은지를 논하기 전에 그 의미를 하급심에서 언제, 어떤 문구로, 어떤 근거와 함께 주장했는지가 먼저 문제된다.

특히 PTAB 절차에서는 항소를 염두에 두고 disputed term, proposed construction, intrinsic evidence, 상대방 해석과의 차이, 그 차이가 특허성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기록에 명확히 남겨둘 필요가 있다. 지방법원에서도 Markman 절차나 약식판결 단계에서 “plain and ordinary meaning”만을 반복하기보다, 상대방과 실제로 어떤 범위 차이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소심에서 더 정교한 해석을 떠올리더라도 이미 늦을 수 있다.

CAFC의 청구항 해석 항소법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청구항 해석은 법률문제이지만, 항소심은 청구항 해석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는 절차가 아니다. 먼저 그 쟁점이 하급심에서 적절히 보존되어 있어야 한다. 그다음 CAFC는 Teva가 정한 심리기준에 따라 원심의 해석을 검토하고, 실제 사건 해결에 필요한 범위에서 청구항의 의미를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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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판례

  • Markman v. Westview Instruments, Inc., 517 U.S. 370 (1996).
  • Teva Pharmaceuticals USA, Inc. v. Sandoz, Inc., 574 U.S. 318 (2015).
  • O2 Micro International Ltd. v. Beyond Innovation Technology Co., 521 F.3d 1351 (Fed. Cir. 2008).
  • In re Google Technology Holdings LLC, 980 F.3d 858 (Fed. Cir. 2020).
  • Qualcomm Inc. v. Intel Corp., 6 F.4th 1256 (Fed. Cir. 2021).
  • MyMail, Ltd. v. ooVoo, LLC, 934 F.3d 1373 (Fed. Cir. 2019).
  • University of Massachusetts v. L’Oréal S.A., 36 F.4th 1374 (Fed. Cir. 2022).
  • ST Case1Tech, LLC v. Squires, Nos. 2023-2305, 2023-2306, slip op. (Fed. Cir. Oct. 9, 2025) (nonprecedential).

Wednesday, September 23, 2026

특허 청구항이 명확해도 라이선스는 모호할 수 있다 — Intel v. VIA 판결이 특허 라이선스 실무에 남긴 교훈

기술표준의 선택사양, 동적 정의, Claim-Level 분석과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

특허 라이선스를 일반적인 임대차계약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무엇을 빌려주고 빌리는지 알고 있으니 표준계약서에 필요한 사항을 채워 넣고 몇 가지 특약만 정하면 된다는 식이다. 계약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전문가들조차 이러한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특허 라이선스에서는 이러한 접근이 위험할 수 있다. 특허 라이선스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로열티율(royalty rate)을 얼마로 정할 것인가에 앞서, 도대체 무엇이 라이선스되는 권리(licensed rights)인가를 정확하게 특정하는 문제 이다.

부동산 임대차에서는 계약 목적물이 대체로 물리적으로 명확하다. 예컨대 “서울시 ○○구 ○○동 ○○번지 건물 3층”이라고 특정하면 어느 공간을 임대하는지가 비교적 분명하다.

그러나 계약 목적물을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서울시 ○○구 ○○동 ○○번지의 공간”이라고 정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목적물의 범위가 고정된 위치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베이커리 운영에 필수적인가’라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일종의 동적인 정의(dynamic definition)라고도 한다.

특허 라이선스에서는 이러한 동적 정의를 흔히 접한다. 예를 들어 라이선스 대상을 “AA 제품을 제조, 위탁제조, 사용, 수입, 판매의 청약 또는 판매하는 과정에서 침해를 피할 수 없는 특허”라고 정하는 방식이다.

라이선서와 라이선시 모두 불필요하게 넓은 특허군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으면서 실제 사업에 필요한 권리만을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호할 만한 방식이기도 하다.

문제는 라이선스 대상을 동적으로 정의하면 제품의 설계나 기술규격이 변경될 때마다 라이선스 범위도 다시 판단해야 한다는 데 있다.

결국 다음의 연결관계를 단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기술규격 → 제품 기능 및 구현 → 특허청구항 → 라이선스 범위

어느 한 단계에서 해석이 달라지면 계약의 적용범위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성공적인 특허 라이선스 협상과 계약서 작성에는 계약법에 관한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특허청구항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관련 특허기술과 실제 제품의 구조·작동방식을 이해해야 하며, 나아가 해당 기술과 제품이 회사의 사업계획과 시장전략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까지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층위의 판단을 하나의 계약 문언으로 정합적으로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특허 라이선스는 Intel과 같이 특허와 라이선싱 경험이 풍부한 기업에게조차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2003년 미국 연방항소법원의 Intel v. VIA 사건을 살펴보는 것은 특허 라이선스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이 사건은 특허청구항 자체가 명확하더라도 그 특허가 라이선스 범위에 포함되는지는 별개의 문제 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라이선스 문언과 기술규격, 그리고 실제 제품 구현의 관계에 따라 상당한 해석상 불확실성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표준기술에 관한 특허전략에서는 이 문제의 의미가 더욱 커진다.

표준의 보급을 촉진하기 위해 일정한 표준필수특허에는 무상 또는 개방적인 라이선스 전략을 취하여 기술의 시장 확산과 영향력을 극대화하면서도, 표준의 선택 기능이나 주변 구현기술에 관한 특허에는 별도의 유상 라이선스 전략을 유지하여 사업상 수익과 경쟁우위를 확보하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Intel v. VIA는 이러한 복합적인 라이선스 전략을 실제 계약 문언으로 구현할 때 무엇을 어디까지 라이선스할 것인지, 그리고 그 경계를 어떻게 명확하게 표현해야 하는지 를 생각하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1. 특허의 명확성과 라이선스 범위의 상충

컴퓨터 칩셋 통신 표준인 AGP(Accelerated Graphics Port, 가속 그래픽 포트)를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 연방항소법원의 Intel Corp. v. VIA Techs., Inc. (Fed. Cir. 2003) 판결은 특허 라이선스 실무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인텔(Intel)은 비아(VIA)가 자사의 패스트 라이트(Fast Write) 기술이 담긴 ‘291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비아가 인텔과의 무상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에 따라 정당한 실시권을 확보했다고 판단해 비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부 판단의 핵심은 특허 청구항의 유효성과 라이선스 계약 해석을 명확히 분리한 데 있다.

법원은 ‘291 특허에 구체적인 회로 도면이 없더라도 당업자가 기술을 이해할 수 있어 유효하고 명확하다고 보았다.

반면 해당 특허를 허락한 라이선스 계약의 범위에 대해서는 문언이 모호하다고 판단하여,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 (contra proferentem)을 적용했다.

특허 청구항 기재가 아무리 명확하더라도, 이를 포섭하는 라이선스 계약 조항은 얼마든지 모호해질 수 있다.

2. AGP 규격의 필수성과 선택성 구조

이 사건의 본질을 짚으려면 인텔이 제시한 AGP 기술 규격의 체계와 계약서에 명시된 ‘필수성(Required)’ 요건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1. 기술적 배경과 선택 프로토콜

인텔은 1996년 AGP 1.0 규격을 내놓은 뒤, 1998년 전송 속도를 한층 끌어올린 AGP 2.0 규격을 발표했다.

AGP 2.0에는 ‘4배속 전송(4x transfer)’과 ‘패스트 라이트(Fast Write)’라는 두 가지 프로토콜이 새로 추가되었다.

주목할 대목은 두 기능 모두 규격서상 반드시 구현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 프로토콜(optional protocol)로 분류되었다는 점이다.

제조사가 패스트 라이트를 구현하지 않더라도 AGP 2.0 규격을 충족하는 공식 호환 제품으로 인정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2.2. ‘Required(필수성)’ 개념의 두 가지 해석

라이선스 계약을 둘러싼 공방은 ‘필수적(required)’이라는 문언을 어떤 기준에 비추어 해석할 것인가에서 출발했다.

쟁점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해석 1. 표준 전체를 기준으로 보는 관점
AGP 2.0 규격을 따르는 모든 제품이 예외 없이 탑재해야 하는 기본 사양만을 ‘필수’로 보는 입장이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패스트 라이트는 어디까지나 선택 사양에 불과하므로, 라이선스가 허여되는 필수 기능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해석 2. 개별 선택 기능의 구현을 기준으로 보는 관점
패스트 라이트 자체의 탑재 여부는 제조사의 선택일지라도, 일단 이를 구현하기로 결정했다면 규격서에 명시된 특정 제어 신호 (버퍼 상태를 알리는 WBF# 신호 등)와 동작 규칙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즉 선택 기능을 구현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기술 규격 역시 ‘필수’ 규격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논리다.

2.3. “disclosed in, and required by” 문구를 둘러싼 대립

인텔의 AGP 라이선스 계약은 무상 라이선스 대상을 “AGP 규격서에 공개되고, 그에 따라 요구되는 (disclosed in, and required by) 인터페이스 및 프로토콜”로 규정하고 있었다.

바로 이 조항의 해석을 두고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렸다.

Intel의 주장
‘required by’라는 문언은 AGP 2.0 표준 전체를 충족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기본 기능만을 뜻한다. 따라서 선택 사양에 불과한 Fast Write 기술과 관련 ‘291 특허는 무상 라이선스 대상에서 제외된다.
VIA의 주장
Fast Write의 채택 자체는 선택일지라도, 일단 제품에 구현하기로 한 이상 규격서에 명시된 제어 신호(WBF#)를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따라서 이 역시 규격서가 ‘요구하는’ 기술에 해당하며, 관련 특허 역시 계약상 무상 라이선스 범위에 포함된다.

2.4. 연방법원의 판단: ‘필수 과목 교재’ 비유와 모호성 인정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쟁점 조항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학교가 요구하는 과목의 교재 (books required by a school)’라는 비유를 들었다.

이 문구는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필수 과목의 교재를 뜻할 수도 있지만, 특정 선택 과목을 수강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하는 교재를 의미할 수도 있다.

법원은 인텔의 엄격한 이분법적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인텔이 자체 작성한 AGP 2.0 기술 규격서에서도 선택 프로토콜인 Fast Write의 내부 신호(WBF#)에 ‘Required(R)’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For example, books ‘required by’ a school could mean books needed for (1) ‘required’ (non-optional) classes; or (2) any class taken, including optional classes.”
번역

“예를 들어, 학교에서 ‘요구되는(required by)’ 책이란 (1) 필수(비선택) 과목에 필요한 책을 의미할 수도 있고, (2) 선택 과목을 포함하여 수강하는 임의의 과목에서 필요한 책을 의미할 수도 있다.”

법원은 결국 인텔과 비아 양측의 해석이 기술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모두 타당하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해당 계약 조항에는 양립 가능한 두 해석이 팽팽히 맞서는 진정한 모호성(ambiguity)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3. ‘동적 정의’의 구조와 다단계 연결 작업

인텔의 AGP 라이선스 계약은 특정 특허 번호를 일일이 열거하는 대신, 4단계에 걸친 연쇄적 정의 (chain of definitions) 방식을 취했다.

라이선스 부여 → Interface Claims → AGP Interfaces → AGP Specifications
  • 라이선스 부여(License Grant): AGP 인터페이스를 준수하는 제품에 특허 라이선스를 부여한다.
  • 인터페이스 청구항(Interface Claims): AGP 인터페이스를 준수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침해할 수밖에 없는 (must be infringed) 특허 청구항을 의미한다.
  • AGP 인터페이스(AGP Interfaces): 규격서에 공개되고 그에 따라 요구되는 (disclosed in, and required by) 전기적 인터페이스 및 버스 제어 프로토콜이다.
  • AGP 규격서(AGP Specifications): 인텔이 발행한 AGP 1.0 및 2.0 기술 규격 문서다.

이러한 동적 정의(dynamic definition) 방식은 기술이 발전하거나 규격이 개정되더라도 매번 계약서를 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실제 라이선스의 보호 범위를 확정하려면 ‘기술 규격’에서 출발하여 ‘제품 기능’과 ‘특허 청구항’을 거쳐 ‘라이선스 범위’로 이어지는 다단계 연결 고리를 매번 검증해야 하는 난제를 안게 된다.

기술규격 → 제품기능 → 특허청구항 → 라이선스 범위

3.1. 라이선스 부여 조항(License Grant)

a nonexclusive, royalty-free, nontransferable, non-sublicenseable, worldwide license under its Interface Claims to make, have made, use, import, offer to sell and sell products which comply with the AGP Interfaces; provided that such license shall not extend to features of a product which are not required to comply with the AGP Interfaces or to which there was a feasible alternative to infringing a given claim.
번역

“AGP 인터페이스를 준수하는 제품을 제조, 위탁 제조, 사용, 수입, 판매 제안 및 판매할 수 있도록 인터페이스 청구항(Interface Claims)에 대한 비독점적, 무상, 양도 불가, 재라이선스 불가한 전 세계적 라이선스를 부여한다. 단, AGP 인터페이스를 준수하는 데 요구되지 않는 (not required to comply with) 제품의 기능이나, 특허 침해를 피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대안이 존재하는 기능에는 본 라이선스가 미치지 아니한다.”

3.2. 인터페이스 청구항 정의(Interface Claims)

‘Interface Claims’ means claims of a patent or patent application, which are owned or controlled by a party, that must be infringed in order to comply with the AGP Interfaces. ‘Interface Claims’ does not include claims relating to manufacturing technology, claims not required to be infringed in complying with the AGP Interfaces (even if in the same patent as Interface Claims), or claims which, if licensed, would require a payment of royalties to unaffiliated third parties.
번역

“‘인터페이스 청구항’이란 당사자가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특허 또는 특허 출원의 청구항으로서 AGP 인터페이스를 준수하기 위해 반드시 침해되어야 하는 청구항을 의미한다. ‘인터페이스 청구항’에는 제조 기술에 관한 청구항, AGP 인터페이스를 준수함에 있어 침해될 것이 요구되지 않는 청구항 (동일 특허 내에 있더라도 제외), 또는 라이선스 부여 시 계열사가 아닌 제3자에게 로열티를 지급해야 하는 청구항은 포함되지 않는다.”

3.3. AGP 규격서 정의

‘Accelerated Graphics Port Interface Specifications’ are the specifications described in the documents entitled Accelerated Graphics Port Interface Specification, Revisions 1.0 and 2.0, published by Intel.
번역

“‘가속 그래픽 포트 인터페이스 규격’이란 인텔이 출판한 ‘가속 그래픽 포트 인터페이스 규격서 Revision 1.0 및 2.0’이라는 제목의 문서에 기술된 규격을 의미한다.”

3.4. 단서 조항(Provided Clause)

...provided that such license shall not extend to features of a product which are not required to comply with the AGP Interfaces or to which there was a feasible alternative to infringing a given claim.
번역

“...단, AGP 인터페이스를 준수하는 데 요구되지 않는 제품의 기능이나, 특정 청구항(특허)을 침해하지 않고도 구현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대안(feasible alternative)이 존재하는 기능에는 본 라이선스가 미치지 아니한다.”

3.5. 실무에서 확인해야 할 다섯 가지 질문

특히 제품 설계가 바뀌거나 새로운 선택 기능이 추가될 때마다 실무진은 다음의 다섯 가지 질문을 검토해야 한다.

  1. 해당 기술이 표준 준수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기술인가?
  2. 그 기술을 구현할 때 특허권자의 어떤 청구항이 침해되는가?
  3. 그 청구항은 표준을 준수하기 위해 반드시(must) 침해될 수밖에 없는 성격인가?
  4. 특허를 우회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비침해 대안(feasible alternative)이 존재하는가?
  5. 표준 전체에서는 선택 사양(optional feature)인 기능을 탑재했을 때도 해당 청구항이 라이선스 범위에 포섭되는가?
표준 규격서에 기술이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라이선스가 자동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실행 가능한 비침해 대안이 존재하는지, 표준 준수를 위해 불가피한 필수 기술인지 (essentiality)를 따지는 다층적 필터를 통과해야 비로소 라이선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4. 특허 청구항의 명확성 vs. 라이선스 조항의 모호성

Intel v. VIA 사건은 특허 청구항 해석(claim construction)과 라이선스 계약 해석(contract construction)이 서로 완전히 다른 법적 층위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4.1. 특허 자체는 명확했다

소송 과정에서 비아는 ‘291 특허 명세서에 구체적인 전자 회로도가 누락되었음을 지적했다.

기술의 범위가 불분명하므로 미국 특허법상 명확성 요건 (35 U.S.C. § 112 ¶ 2)을 결여하여 무효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허 명세서에 도면 3개와 신호 차트 35개, 버퍼 상태 신호(WBF#) 프로토콜 및 코어 로직 수정 방식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 해당 기술 분야의 통상 기술자 (person skilled in the art)라면 회로도가 없더라도 기술을 구현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허 청구항 자체의 유효성과 명확성은 인정되었다.

4.2. 그러나 라이선스 계약은 모호했다

반면 라이선스 계약 해석의 영역에서는 판도가 뒤바뀌었다.

해당 계약이 인텔이 일방적으로 작성하여 상대방에게 수락 여부만을 양자택일하도록 요구한 표준 서식 (take-it-or-leave-it)이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법원은 양측의 해석이 모두 합리적이어서 계약상 모호성이 발생한 이상, 준거법인 델라웨어주 법에 따라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 (contra proferentem)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허를 명확하게 작성했다고 해서 그 특허의 라이선스 범위까지 자동으로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특허의 권리범위와 계약상 허여범위는 별도로 설계하고 검토해야 한다.

5. 기술 이해에 기반한 특허 라이선스 실무의 교훈

Intel v. VIA 판결은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일반적인 표준 계약 조항(boilerplate) 수준으로 안이하게 다루었을 때 어떠한 법적 위험이 뒤따르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허 라이선싱 협상과 계약서 작성은 단순한 법률 문언 정리를 넘어, 해당 기술의 실제 동작 메커니즘과 청구항 해석(claim construction)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특허 라이선싱 협상과 계약 체결은 반드시 특허 발명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청구항 해석(Claim Construction)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기업 실무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전략을 계약에 명확히 반영해야 한다.

첫째. 기술표준의 계층 구조를 계약 문언에 구체적으로 투영한다.
계약서에 단순히 “표준 준수에 필요한 특허”와 같은 포괄적인 표현을 쓰면, 표준 전체를 아우르는 필수 사양과 특정 선택 기능에 종속된 필수 규격이 충돌하면서 예상치 못한 법적 모호성을 낳게 된다.
둘째. 특허 단위가 아닌 청구항 단위(claim-level)의 정밀한 라이선싱 검토가 필요하다.
제품의 특정 기능이나 세부 구현 방식에 실제로 어떤 청구항이 결합하는지를 사전에 철저히 분석하고, 그 범위를 계약서에 구체적으로 한정해야 분쟁의 소지를 차단할 수 있다.
셋째. 명시적 제외 조항(express exclusions)을 적극 활용한다.
특허권자 입장에서 선택적 프로토콜이나 특정 부가 기술에 대한 무상 실시를 허용할 의도가 없다면, 다단계 정의의 간접적 해석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선택적 프로토콜 구현을 위한 청구항은 라이선스 대상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한다”는 식의 직접적인 배제 문언을 명시해야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이 적용되어 특허권 행사가 가로막히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
특허 라이선스 계약에서 가장 위험한 문언은 반드시 어려운 법률용어나 복잡한 조항만은 아니다.

required, necessary, must be infringed, comply with처럼 겉보기에는 평범한 단어도 기술표준의 계층 구조와 결합되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특허 라이선스의 범위를 제대로 설계하려면 계약서만 읽어서는 부족하다. 기술을 이해하고, 제품의 구현방식을 파악하고, 청구항을 해석한 다음, 그 결과를 계약 문언과 다시 연결해야 한다.

Saturday, August 29, 2026

미국 특허소송은 어디에서 승패가 갈리는가 — 한국 기업이 알아야 할 7단계와 단계별 승소 전략

미국 특허소송 7단계와 한국 기업의 단계별 대응전략
미국 특허소송은 단순히 “우리 제품이 상대방 특허와 다르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설명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청구항 해석, Discovery, Summary Judgment, 균등론, 배심재판, JMOL과 항소심까지 각 절차에서 확보한 결과가 다음 단계의 선택지를 결정합니다. 결국 미국 특허소송은 기술의 싸움인 동시에 절차적 전략의 싸움입니다.

미국 특허소송은 한국 기업에 유난히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유는 단순히 소송비용이 비싸거나 영어로 재판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누가 무엇을 판단하는지, 어떤 쟁점을 어느 단계에서 제기해야 하는지, 한 번 놓친 절차적 기회가 이후 배심재판과 항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한국의 소송절차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의 특허침해소송에서는 판사와 배심원의 역할이 나뉩니다. 특허청구항의 의미를 확정하는 Claim Construction은 판사가 담당하지만, 그렇게 해석된 청구항을 피고 제품에 적용하여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문제는 사실판단 문제로 배심원이 개입합니다.[1]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기업은 미국 특허소송을 “우리 제품이 상대방 특허와 기술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잘 설명하면 되는 싸움”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 소송에서는 어떤 청구항 해석을 확보할 것인지, 어떤 내부문서가 Discovery를 통해 상대방에게 넘어갈 것인지, 어떤 쟁점을 배심원에게 보내지 않고 법률문제로 먼저 처리할 것인지, 그리고 Rule 50(a) motion을 언제 제기하여 항소심까지 쟁점을 보존할 것인지가 서로 연결되어 움직입니다.

먼저 영상으로 보는 가상 특허침해사건

아래 설명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상의 미국 특허침해소송을 하나 설정했습니다.

A사는 미국 특허권자이고, B사는 미국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는 한국 기업입니다.

A사는 B사의 제품이 자사의 특허를 침해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B사는 해당 특허를 검토한 후 기존 구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전혀 다른 물리적 작동원리를 채택한 제품을 개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개발과정에서 B사의 한 엔지니어가 시험보고서에 특정 부품에서 “미세 회전(micro-rotation)이 발생한다”는 표현을 남겼습니다.

A사의 주장:
“피고도 자신의 제품에서 회전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결국 특허기술을 조금 변형하여 사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B사의 주장:
“문제의 미세 움직임은 특허가 요구하는 회전작동과 물리적 원리도, 기능도, 결과도 다릅니다. 당사의 제품은 특허기술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별개의 설계원리에 따라 개발된 제품입니다.”

이 가상사례를 영상으로 먼저 보시면 아래에서 설명하는 미국 특허소송의 각 절차가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미국 특허소송 실전공방 — 가상 특허침해소송 시나리오

영상이 표시되지 않는 경우 Google Drive에서 영상 열기

1. 소송 초기 전략 — 무엇을 먼저 구조화할 것인가

미국 특허소송은 원고가 연방법원에 Complaint를 제출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피고기업의 대응은 단순히 “침해하지 않았다”고 답변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소장을 받은 순간부터 관할과 venue, 청구항별 비침해 논리, 선행기술과 무효자료, prosecution history, PTAB 절차의 활용 가능성, 손해배상 및 고의침해 리스크 등을 동시에 살펴야 합니다.

이때 사건의 일부 쟁점을 분리하여 심리하는 FRCP Rule 42(b)의 Separate Trial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Rule 42(b)는 convenience, prejudice 회피, 신속성과 경제성을 위해 법원이 특정 issue나 claim을 별도로 심리하도록 할 수 있게 합니다.[2]

그러나 Bifurcation은 특허 피고가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아니고, 모든 사건에서 사용해야 할 필수전략도 아닙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떤 쟁점을 배심원에게 보내기 전에 판사의 법률판단으로 먼저 해결할 수 있는가?”

어떤 사건에서는 Rule 42(b)보다 Claim Construction이나 Partial Summary Judgment가 훨씬 강력할 수 있습니다.

2. Discovery — 소송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 회사의 과거 문서일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이 미국 특허소송에서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을 받는 절차 중 하나가 Discovery, 특히 전자정보개시(E-Discovery)입니다.

이메일, 메신저, 연구보고서, 실험자료, 회의록, 설계변경 기록, 사내 프레젠테이션 등이 증거개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상대방이 요구하면 모든 문서를 무조건 제출해야 한다”는 설명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FRCP Rule 26(b)(1)은 Discovery의 범위를 claim 또는 defense와 관련되고(relevant), 사건의 필요에 비례하며(proportional), privilege로 보호되지 않는 사항으로 한정합니다.[3]

문제는 문서의 존재보다 그 문서에 어떤 표현이 남아 있는가입니다.

“경쟁사 특허와 거의 동일하지만 이 부분만 조금 변경했다.”

이러한 표현 하나가 곧바로 법적 침해를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를 모방의 정황, 제품개발 경위, 특허에 대한 인식 또는 고의침해 주장과 연결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개발 당시의 문서에 다음과 같은 기술적 기록이 남아 있다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기존 회전식 체결구조와 달리 본 구조는 축방향 탄성변형으로 체결력을 발생시키며, 회전변위는 기능적 작동원리가 아니다.”

좋은 R&D 문서관리는 “침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설계목적, 작동원리, 대안검토와 시험결과를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언어로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3. Markman — 많은 특허소송의 실질적인 승부처

미국 특허소송에서 가장 특허소송다운 절차는 Claim Construction입니다.

1996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Markman v. Westview Instruments 판결은 특허청구항의 해석이 배심원이 아니라 법원이 판단하는 사항임을 확립했습니다.[4]

Claim Construction — 청구항의 의미는 무엇인가?
↓
Infringement — 그렇게 해석된 각 limitation이 피고 제품에 존재하는가?

예를 들어 청구항에 “rotatably coupled”라는 문언이 있고, 법원이 이를 실질적인 회전운동을 허용하는 결합관계라고 해석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피고 제품이 구조적으로 회전하지 않고 축방향 변형만 일으킨다면 이후 침해분석의 지형은 피고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rotatably”가 미세한 상대운동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Claim Construction은 단순한 용어 정의절차가 아니라 침해분석이 이루어질 법적 경계를 정하는 절차입니다.

4. Summary Judgment — 배심원에게 가기 전에 사건을 끝낼 수 있는가

충분한 factual record가 형성되면 중요한 절차가 등장합니다. FRCP Rule 56의 Summary Judgment입니다.

Rule 56(a)는 중요한 사실(material fact)에 genuine dispute가 없고 신청자가 법률상 판결을 받을 자격이 있다면 Summary Judgment를 허용합니다.[5]

특허침해 피고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Missing Limitation입니다.

청구항이 A+B+C+D라는 네 개의 limitation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피고 제품이 A+B+C만 가지고 D를 충족하지 않는다면 문언침해(literal infringement)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석을 끝내서는 안 됩니다. 특허권자는 Doctrine of Equivalents, 즉 균등론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방대법원은 Warner-Jenkinson Co. v. Hilton Davis Chemical Co.에서 균등론을 청구항 전체가 아니라 각 청구항 요소별로 적용해야 한다는 element-by-element 원칙을 확인했습니다.[6]

Claim Construction
↓
Literal Infringement
↓
Doctrine of Equivalents
↓
Prosecution History Estoppel / Ensnarement / 기타 DOE 제한

따라서 올바른 질문은 “한 요소가 없으므로 비침해인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문언상 누락된 limitation을 특허권자가 균등론으로 다시 확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법적 제한으로 이를 차단할 수 있는가?”

5. 균등론의 법적 한계 — Prosecution History Estoppel과 Ensnarement

5-1. Prosecution History Estoppel

특허권자가 특허를 받기 위해 청구항을 좁혔다면, 소송에서 균등론을 이용하여 자신이 포기한 영역을 다시 확보하는 데 제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Festo Corp. v. Shoketsu Kinzoku Kogyo Kabushiki Co.에서 이러한 prosecution history estoppel의 구조를 설명했습니다.[7]

다만 narrowing amendment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균등범위가 자동으로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prosecution history를 검토할 때는 왜 보정했는지, 무엇을 포기했는지, 주장되는 equivalent가 그 포기영역에 포함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5-2. Ensnarement

특허권자는 균등론을 이용하여 자신이 애초에 특허로 받을 수도 없었던 선행기술 영역까지 독점할 수 없습니다.

Federal Circuit은 DePuy Spine v. Medtronic Sofamor Danek에서 ensnarement를 균등론에 대한 법적 제한으로 설명하고, 궁극적으로 법원이 판단할 문제라고 정리했습니다.[8]

이때 널리 사용되는 분석기법이 Hypothetical Claim Analysis입니다.

“피고 제품까지 문자 그대로 포함하도록 실제 청구항을 가상으로 넓혀 본다면, 그렇게 넓어진 청구항이 선행기술에 비해 특허받을 수 있었는가?”

답이 부정적이라면 특허권자는 균등론을 통해서도 그 범위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Jang v. Boston Scientific Corp.는 hypothetical claim을 이용한 ensnarement 분석과 특허권자의 입증부담이 실제 사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9]

좋은 전략은 “배심원을 무조건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심원이 판단할 사실문제와 판사가 결정할 법률문제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6. Jury Trial과 Special Verdict — 기술만 설명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Summary Judgment에서 사건이 종결되지 않으면 결국 Jury Trial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국 기업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습니다.

“우리 제품이 기술적으로 다른 이유를 전문가가 상세히 설명하면 배심원이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기술적 차이를 배심원에게 그대로 쏟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피고의 핵심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원고 특허는 “회전에 의해 잠금력을 발생시키는 구조”입니다.

피고 제품은 “축방향 탄성변형에 의해 잠금력을 발생시키는 구조”입니다.

외관상 작은 움직임이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힘을 발생시키는 물리적 메커니즘이 다릅니다.

이것은 감성적인 서사가 아니라 복잡한 기술차이를 배심원이 검증할 수 있는 단순한 기술명제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Design-Around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경쟁사의 특허를 검토했다는 사실과 특허침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특허의 권리범위를 검토하고 그 밖에서 별도의 기술적 해결방법을 개발하는 design-around는 특허제도가 예정하고 있는 경쟁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설계회피를 의도했으므로 침해가 아니다”라는 주장 역시 잘못입니다. 최종 제품이 실제 claim limitation을 충족한다면 침해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설계회피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가 아니라 청구범위 밖의 실질적으로 다른 기술적 해결방법을 구현했는가입니다.

Special Verdict

FRCP Rule 49(a)는 법원이 배심원에게 각 사실쟁점에 대한 special written finding을 요구할 수 있게 합니다.[10]

복잡한 특허사건에서는 limitation별 판단이나 literal infringement와 equivalence를 구분하여 배심원의 사실판단을 기록에 남기는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Special Verdict의 목적은 배심원을 논리적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정한 가치는 배심원의 판단을 쟁점별로 명료하게 기록하여 verdict의 논리구조와 appellate record를 정교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7. Rule 50과 Federal Circuit — Trial이 끝나도 절차전략은 계속됩니다

배심원이 특허침해를 인정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렇다고 법적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미국 민사소송에는 Judgment as a Matter of Law, JMOL이라는 중요한 장치가 있습니다.

Rule 50(a) JMOL
↓
Jury Verdict
↓
Rule 50(b) Renewed JMOL
↓
Federal Circuit Appeal

Rule 50(b)는 완전히 새로운 motion이 아니라 선행한 Rule 50(a) motion을 갱신하는 구조입니다.[11]

따라서 Trial 중 Rule 50(a)를 제대로 제기하지 않으면 post-verdict 단계뿐 아니라 항소심에서 중요한 쟁점의 보존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미국 소송대리인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할 질문:

“Federal Circuit 항소까지 필요한 grounds가 Rule 50(a) 단계에서 제대로 preservation되어 있는가?”

Rule 52는 어디에서 작동하는가

Rule 52를 배심원 평결을 뒤집기 위한 일반적인 post-verdict 수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Rule 52(a)는 기본적으로 jury 없이 사실을 심리한 사건이나 advisory jury 사건에서 법원이 findings of fact와 conclusions of law를 제시하는 구조입니다.[12]

Rule 52(a)(6)에 따르면 이러한 법원의 factual finding은 clearly erroneous하지 않는 한 항소심에서 존중됩니다.

특허법에서는 Teva Pharmaceuticals USA v. Sandoz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연방대법원은 Claim Construction의 최종적인 법률적 해석과 그 과정에서 extrinsic evidence에 의존하여 이루어진 subsidiary factual findings를 구별했습니다.[13]

Federal Circuit에서의 Standard of Review

항소심에서는 모든 판단을 동일한 기준으로 다시 심사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다투는지에 따라 Standard of Review가 달라집니다.

Claim Construction의 최종 법률판단
→ De Novo

Claim Construction 과정의 subsidiary factual findings
→ Clear Error

Jury의 사실판단
→ 해당 평결을 지지하는 substantial evidence가 있는지가 핵심

재량적 결정
→ 사안에 따라 Abuse of Discretion

따라서 항소전략은 Trial이 끝난 뒤 처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Discovery, Claim Construction, Expert Testimony, Verdict Form과 Rule 50(a) 단계에서부터 이미 Federal Circuit을 위한 appellate record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좋은 Trial 전략은 배심원에게 이기는 것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Federal Circuit이 나중에 어떤 Standard of Review로 그 기록을 보게 될 것인지까지 생각하면서 Trial Record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 기업이 기억해야 할 5가지 원칙

첫째. 청구항을 먼저 읽고 제품을 보십시오

“제품이 비슷하다” 또는 “기술적으로 다르다”는 직관만으로 특허침해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Claim → Limitation → Accused Product

둘째. Missing Limitation에서 분석을 끝내지 마십시오

문언상 하나의 limitation이 없다면 literal infringement는 부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Doctrine of Equivalents가 있습니다.

Literal Infringement → DOE → PHE / Ensnarement 등 DOE 제한

셋째. R&D 문서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남겨야 합니다

경쟁사 특허 검토, 대안설계, 설계변경 이유와 시험결과를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술언어로 기록하십시오.

소송이 발생한 뒤 만들어낸 설명보다 개발 당시 작성된 정확한 기록이 훨씬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판사가 판단할 문제와 배심원이 판단할 문제를 구별하십시오

Claim Construction, prosecution history estoppel, ensnarement과 같은 법적 문제와 실제 infringement 또는 equivalence에 관한 사실문제를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Trial과 Appeal을 별개의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objection 하나, expert testimony 하나, verdict question 하나와 Rule 50(a) motion 하나가 수개월 뒤 Federal Circuit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의 범위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맺음말 — 미국 특허소송의 진짜 승부는 기술과 절차의 교차점에서 결정됩니다

한국 기업이 미국 특허소송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미국 배심원이 외국기업에 불리하다”는 막연한 공포가 아닙니다.

더 위험한 것은 미국 소송절차의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한국식 소송감각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특허소송의 출발점은 결국 청구항입니다. 그러나 청구항만 잘 분석한다고 소송에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Claim Construction에서 어떤 의미를 확보할 것인지, Discovery에서 어떤 객관적인 개발기록을 제시할 것인지, Summary Judgment에서 어떤 쟁점을 제거할 것인지, Jury에게 어떤 사실문제를 맡길 것인지, Rule 50에서 어떤 논점을 보존할 것인지가 서로 연결됩니다.

미국 특허소송은 하나의 거대한 Trial만으로 이루어진 싸움이 아닙니다. 작은 절차적 전투들이 연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절차에서 확보한 결과가 다음 단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선택지를 결정합니다.

결국 미국 특허소송에서 가장 강한 기업은 반드시 가장 좋은 기술을 가진 기업도, 가장 많은 특허를 보유한 기업도 아닙니다.

자신의 기술을 정확히 이해하고, 특허의 권리범위를 정확히 분석하며, 그 차이를 미국 절차법이 요구하는 시점과 형식에 맞추어 증거와 법리로 전환할 수 있는 기업이 가장 강합니다.

판례·FRCP 원문 및 참고자료

  1. Markman v. Westview Instruments, Inc., 517 U.S. 370 (1996). 특허 청구항 해석을 법원이 담당한다는 기본 판례. 원문 보기
  2. Fed. R. Civ. P. 42(b) — Separate Trials. 원문 보기
  3. Fed. R. Civ. P. 26(b)(1) — Discovery Scope and Limits. Relevance와 proportionality 기준. 원문 보기
  4. Markman v. Westview Instruments, Inc., 517 U.S. 370 (1996). 원문 보기
  5. Fed. R. Civ. P. 56(a) — Summary Judgment. 원문 보기
  6. Warner-Jenkinson Co. v. Hilton Davis Chemical Co., 520 U.S. 17 (1997). 균등론의 element-by-element 적용 원칙. 원문 보기
  7. Festo Corp. v. Shoketsu Kinzoku Kogyo Kabushiki Co., 535 U.S. 722 (2002). Prosecution History Estoppel과 균등론의 관계. 원문 보기
  8. DePuy Spine, Inc. v. Medtronic Sofamor Danek, Inc., 567 F.3d 1314 (Fed. Cir. 2009). Ensnarement의 법적 성격. Federal Circuit 원문
  9. Jang v. Boston Scientific Corp., 872 F.3d 1275 (Fed. Cir. 2017). Hypothetical Claim과 Ensnarement 분석. Federal Circuit 원문
  10. Fed. R. Civ. P. 49(a) — Special Verdict. 원문 보기
  11. Fed. R. Civ. P. 50(a), (b) — Judgment as a Matter of Law 및 Renewed JMOL. 원문 보기
  12. Fed. R. Civ. P. 52(a) — Findings and Conclusions by the Court. 원문 보기
  13. Teva Pharmaceuticals USA, Inc. v. Sandoz, Inc., 574 U.S. 318 (2015). Claim Construction 과정에서의 subsidiary factual findings와 clear-error review. 원문 보기
Disclaimer
이 글은 미국 특허침해소송의 전체적인 절차와 기업의 대응전략을 설명하기 위한 일반적인 연구·교육 자료입니다. 구체적인 사건에서는 관할 법원, Local Patent Rules, Scheduling Order, 청구항 문언, 명세서와 Prosecution History, 침해주장 및 증거관계에 따라 적용되는 절차와 전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Sunday, September 21, 2025

[심층 분석] 2025년 특허법 개정, ‘수출’의 모든 것 (미국 법제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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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대, 특허권의 국경을 다시 그리다

혹시 이런 상상 해보셨나요? 우리나라에서 만든 부품을 중국으로 보내 조립한 뒤, 미국 시장에 팔면 국내 특허를 피할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특허는 그 나라에서만 힘을 쓴다’는 속지주의 원칙이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에 맞춰 계속 진화하고 있거든요.

특히 요즘처럼 부품을 전 세계에서 조달하고, 또 다른 나라에서 조립해 제3국에 파는 일이 흔한 시대에는 더욱 그렇죠. 이런 ‘특허 회피’ 전략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나라가 바로 미국과 한국입니다. 두 나라는 국경을 넘나드는 ‘수출’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법을 발전시켜 왔는데요. 오늘은 바로 그 흥미진진한 법의 진화 과정을 샅샅이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제1부: 미국 법제의 진화 - ‘사법이 만든 공백, 입법으로 메우다’

미국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요? 모든 것의 발단은 1972년 ‘Deepsouth’라는 유명한 판결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법원은 미국 내에서 특허 발명의 ‘모든’ 구성요소를 결합하지 않고, 부품 형태로 수출해서 해외에서 조립하는 행위는 특허 침해가 아니라고 판결했습니다. 특허법이 ‘제조(make)’ 행위만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건 뭐, 대놓고 ‘이렇게 하면 특허 피해 갈 수 있어요’라고 알려준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 특허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법적 허점, 이른바 ‘Deepsouth Loophole’이 탄생하게 됩니다.

당연히 난리가 났겠죠? 특허권자들은 재앙과도 같은 이 판결에 반발했고, 결국 미국 의회가 직접 나섰습니다. 12년이 지난 1984년, 의회는 대법원의 ‘초대’에 응답하듯 특허법 제271조 (f)항을 신설해서 이 법적 공백을 완벽하게 메워버립니다. 이 조항의 핵심은 침해의 초점을 해외의 ‘조립’이 아닌, 미국 내의 ‘부품 공급’ 행위로 돌린 것이었죠. 속지주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국경 너머에까지 효력을 미치는 기가 막힌 해법이었습니다.

💡 알아두세요! 미국 특허법 § 271(f)의 두 가지 칼날 이 조항은 두 가지 경우를 나누어 규제합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포인트예요.
  • (f)(1) 양으로 승부: 특허품의 ‘모든 또는 실질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부품들을 수출해서 해외 조립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실질적인 부분’은 부품의 개수, 즉 양을 의미해요.
  • (f)(2) 질로 승부: 다른 용도로는 쓰기 힘든 ‘핵심 부품(staple article이 아닌)’ 단 하나라도, 그게 특허품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임을 알면서 해외 조립을 의도하고 수출하는 경우입니다.

결국 미국은 사법부가 엄격한 법 해석으로 만들어낸 명백한 허점을, 의회가 새로운 침해 유형을 정의하는 입법을 통해 해결하는 전형적인 ‘문제 제기(사법부)와 해결(입법부)’의 길을 걸었습니다. 권력 분립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산업계의 요구에 부응한 셈이죠.

제2부: 한국 법제의 진화 - ‘사법의 진화, 입법으로 완성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한국의 접근 방식은 미국과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는 새로운 법 조항을 만들기보다는, 기존 법률의 ‘해석’을 통해 점진적으로 규제 범위를 넓혀나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판례에만 의존하는 것의 한계가 드러나자, 마침내 입법부가 나서서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길을 택했죠.

과거 한국 법원은 부품이나 반제품 수출에 대해 특허 침해를 인정하는 데 소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봉합사 판결’(2019다222782) 등에서 미완성품이라도 국내 생산 부분이 특허의 실질적 가치를 구현하고 해외에서 간단한 가공만 거치면 완성되는 등 특정 요건을 만족하면, 국내 ‘생산’ 행위를 직접침해로 볼 수 있다는 예외적인 법리를 제시하며 변화를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 해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마침내 2025년 7월 22일부터 시행되는 개정 특허법은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2025년 개정 특허법의 핵심: ‘수출’의 명문화

이번 개정의 핵심은 특허법 제2조(정의)와 제127조(침해로 보는 행위)에 ‘수출’을 명시적으로 포함시킨 것입니다. 이제 특허권자는 침해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행위 자체를 ‘직접침해’로 규정하고 침해금지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1. 법적 공백 해소: ‘노키아 판결’ 등에서 확인된, 국내 제조 침해품의 해외 유출을 막지 못했던 입법상 허점을 보완했습니다.
  2. 법 체계 정비: 이미 ‘수출’을 침해로 보던 디자인보호법, 상표법과 체계를 맞추고, 일본·독일 등 주요국과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3. 권리자 보호 강화: 기존에는 복잡하게 국내 ‘생산’ 행위를 입증해야 했지만, 이제 ‘수출’ 사실만으로도 침해를 주장할 수 있어 입증 책임이 크게 줄었습니다.

제3부: 개정법과 판례, 어떻게 함께 작동할까?

“그럼 이제 미완성품을 수출하는 것도 무조건 특허 침해가 되나요?”라고 물으실 수 있겠네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개정법과 기존 판례(봉합사 판결)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상황을 규율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특허 침해의 대원칙은 ‘구성요소 완비의 원칙(All Elements Rule)’입니다. 즉, 특허의 모든 구성요소를 포함해야 침해가 성립하죠. 개정법은 ‘수출 행위’를 규제할 뿐, ‘무엇을’ 수출했는지를 바꾸진 않습니다. 따라서 개정법으로 침해가 되려면, 수출되는 물건이 이미 ‘완성품’이거나, 그 자체로 간접침해에 해당하는 ‘전용품’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봉합사 판결’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이 판례는 구성요소가 일부 빠진 ‘미완성품’이라도, 아주 엄격한 4가지 요건을 만족하면 예외적으로 국내 ‘생산’ 행위 자체를 완성품 생산과 동일하게 보아 직접침해로 인정하는 법리입니다. 전용품이 아니더라도 그 양이 상당하다면 적용될 수 있겠죠?

한-미 법리의 흥미로운 평행 이론

여기서 두 나라의 법리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비슷한 목적지에 도달한 것 같거든요.

  • 한국 특허법 제127조(간접침해)는 침해에만 사용되는 ‘전용품’의 생산·양도 행위를 규제합니다. 이는 미국 특허법 § 271(f)(2)가 침해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핵심 부품’의 수출을 규제하는 것과 기능적으로 유사합니다. (핵심 부품의 질적 사용 규제)
  • 한국 대법원의 ‘봉합사 판결’은 미완성품이라도 ‘실질적인 모든 구성요소’가 포함된 경우 예외적으로 직접침해를 인정합니다. 이는 미국 특허법 § 271(f)(1)이 ‘모든 또는 실질적인 부분’의 부품을 수출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것과 상응하는 역할을 합니다. (상당한 양적 사용 규제)

제4부: 종합 비교 분석 - 미국과 한국의 결정적 차이

‘수출을 통한 특허 회피’라는 같은 문제에 대해, 미국과 한국은 정말 다른 해법을 내놓았습니다. 특히 법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즉 ‘법제 발전 경로’는 각국 사법부와 입법부의 역할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구분 미국 (‘사법 → 입법’ 분업 모델) 한국 (‘사법 → 사법 → 입법’ 동적 상호작용 모델)
법제 발전 경로 연방대법원이 ‘Deepsouth 판결’로 법적 공백을 명확히 제시하고 입법을 촉구하자, 의회가 § 271(f)를 신설하여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권력 분립 원칙에 기반한 전형적인 ‘문제 제기(사법부)와 해결(입법부)’의 분업 모델입니다. 대법원이 ‘노키아 판결’로 엄격한 원칙을 세운 뒤, ‘봉합사 판결’에서 스스로 예외 법리를 창설하며 법 형성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입법부가 이를 수용해 ‘수출’을 명문화하며 법제를 완성했습니다. 점진적인 ‘동적 상호작용’ 모델에 가깝습니다.
침해 규율 방식 간접침해 모델 (해외 조립을 유도/기여) 직접침해 모델 (수출 행위 자체)
입증 책임의 핵심 피고의 ‘주관적 의도’ (유도, 인식) 입증이 중요 ‘객관적 사실’ (침해품, 수출 행위) 입증으로 충분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침해 규율 방식’입니다. 미국은 부품 수출을 해외에서 일어날 침해를 돕는 ‘간접침해’로 보는 반면, 한국은 ‘수출’이라는 행위 자체를 완결된 ‘직접침해’로 봅니다. 이 때문에 특허권자가 소송에서 입증해야 할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미국에서는 “피고가 나쁜 의도를 가졌어요”를 입증해야 하지만, 한국에서는 “피고가 이 물건을 수출했어요”라는 객관적 사실만 입증하면 되는 셈이죠.

제5부: 우리 기업을 위한 전략적 시사점

이러한 복잡한 법제 변화는 글로벌 공급망을 운영하는 우리 기업들에게 중요한 과제를 던져줍니다. 단순히 국내 특허만 피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은 이제 정말 통하지 않습니다.

  1. 공급망 전체의 특허 리스크 분석: 제품 기획 단계부터 부품 조달(한국, 미국), 생산, 조립(제3국), 최종 판매 시장에 이르는 전체 공급망에서 발생할 수 있는 특허 침해 리스크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특히 한국에서 부품을 조달해 제3국에서 조립하는 경우 ‘봉합사 판결’ 요건에 해당하는지, 미국에서 부품을 조달한다면 § 271(f)에 해당하는지 반드시 검토해야 합니다.
  2. 국제 계약서의 정교화: 해외 파트너와 부품 공급 계약, 위탁 생산 계약 등을 체결할 때, 특허 침해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조항은 이제 필수입니다. 특히 최종 제품의 판매 지역, 용도 등을 명확히 하여 예기치 않은 분쟁에 대비해야 합니다.
  3. 분쟁 관할권 및 법리 적용 문제 대비: 미국 본사가 한국 자회사에 침해품 생산/수출을 지시하는 경우, 분쟁이 어느 나라 법원에서 어떤 법리로 다뤄질지 예측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국제사법적 쟁점이 훨씬 더 복잡해질 것입니다.
⚠️ 주의하세요!
본 내용은 복잡한 법률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구체적인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개별 사안에 대한 법적 판단이나 전략 수립은 반드시 특허 전문 변호사 또는 변리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미국의 ‘Deepsouth Loophole’이 정확히 무엇이었나요?
A: 미국 내에서 특허품의 모든 부품을 다 만들어 놓고, 딱 최종 조립만 미국 밖에서 하는 꼼수입니다. 1972년 대법원이 최종 조립이 미국 땅에서 이뤄지지 않았으니 ‘생산’ 침해가 아니라고 판결하면서 합법적인 특허 회피 수단이 되어버렸죠. 이후 1984년 의회가 법을 개정해서 이 허점을 막았습니다.
Q: 한국의 ‘봉합사 판결’은 미완성품 수출에 항상 적용되나요?
A: 아닙니다. 매우 엄격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됩니다. ① 국내에서 생산된 부분이 특허의 실질적 가치를 거의 모두 포함하고, ② 나머지 극히 일부만 부가/대체/제거하면 완성되고, ③ 구매자가 그런 완제품을 만들 것이 명백히 예상되며, ④ 국내에서 완성품을 생산하는 것과 실질적으로 동일하게 볼 수 있는 4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합니다.
Q: 2025년 한국 개정법이 시행되면, 이제 아무 부품이나 수출해도 특허 침해가 되나요?
A: 그렇지 않습니다. 개정법은 ‘수출 행위’를 침해로 추가한 것이지, 침해 ‘물건’의 범위를 바꾼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수출되는 물건이 그 자체로 특허의 모든 구성요소를 갖춘 ‘완성품’이거나, 다른 용도로는 거의 쓸 수 없는 ‘전용품’에 해당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범용 부품을 수출하는 것은 여전히 직접침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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